인천 상륙 작전

Zorrobot (토론 | 기여)님의 2012년 9월 4일 (화) 12:07 판 (r2.7.3) (로봇이 바꿈: nl:Slag bij Incheon)

인천 상륙 작전(仁川上陸作戰, Battle of Incheon)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15일 UN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의 주도로 시작된 상륙작전으로, 한국 전쟁 전반의 전세를 뒤집는 계기가 되었다. 작전 암호명은 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이었다.

인천 상륙 작전
한국 전쟁의 일부

상륙작전 다음날 전차양륙함에서 내리는 미군
날짜1950년 9월 15일 - 9월 28일
장소
결과 UN군, 대한민국 국군의 승리
서울 수복
UN군대한민국 국군의 반격 시작
교전국
유엔의 기 유엔: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미국의 기 미국
네덜란드의 기 네덜란드
뉴질랜드의 기 뉴질랜드
영국의 기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휘관
미국더글러스 맥아더
미국아서 듀이 스트러블
대한민국정일권
대한민국신현준
대한민국백인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김일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최용건
병력
70,000명 불명
피해 규모
222명 1,350명

배경

맥아더는 1950년 6월 29일, 전쟁발발 4일 뒤 한강방어선을 시찰하며 인민군의 후방에 상륙, 병참선을 차단하고 낙동강을 통해 반격에 들어간다는 기본 전략을 세웠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미 해군은 인천항의 간만의 차가 평균 7미터로, 항에 상륙하기 전에 월미도를 먼저 점령해야 하는데다 선단의 접안지역이 좁아 상륙 후 시가전이 불가피한 점 등의 이유로 상륙작전의 최악의 지형이라며 완강히 반대하였다. 해군 일부 인사들이 작전성공률이 5천대 1이라며 격심하게 반대하는 와중에, 맥아더는 이런 난점이 오히려 적의 허점을 찌르는 기습이 될 수 있다며 끝까지 인천상륙을 주장, 결국 8월 28일 미합참본부로부터 승인을 얻었다.

개시

상륙작전은 동해에서 미군함 미주리호삼척 근처에서 상륙작전준비로 오인시키기 위한 공습을 시작했고, 서해에서는 서해 최적의 상륙지점으로 간주된 군산시에서도 상륙작전과 비슷한 수준의 포격을 수차례 실시하는 등의 기만작전으로 시작되었다. 9월 4일 상륙지점인 인천을 고립시키기 위한 공습이 시작되었으며, 상륙 당일인 9월 15일까지 지속되었다. 9월 14일에는 영덕군장사 상륙 작전이 실시되었다.

이와 동시에 맥아더는 고의로 군산상륙작전이라는 거짓정보를 흘렸으며 이 정보에 속아넘어간 인민군들은 군산의 방어를 강화하였고 그 결과 다른 지역의 방어력이 감소하였다.

9월 15일, 작전개시일에 함정 206척, 7만여 명을 동원하여 영종도 근처에 집결, 작전이 시작되었다.

진행

작전의 제 1단계는 월미도의 점령으로 시작되었다. 새벽 5시에 시작된 공격준비사격에 이어 미 제5해병연대의 3대대가 전차 9대를 앞세우고 월미도 전면에 상륙하였다. 월미도는 2시간만에 완전히 미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미군은 부상 7명의 경미한 피해를 입었으며, 인민군은 108명이 전사, 106명이 포로로 잡혔고, 네이팜탄 투하 및 기총소사로 민간인의 피해가 컸다.

제2단계는 국군 제17연대, 미군 제7사단, 미군 제1해병사단의 주도로 인천반도 공격으로 이어졌다. 인민군 제18사단과 인천의 경비병력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미군 제1해병사단과 국군 해병 제1연대는 성공적으로 인민군의 주력이 규합할 시간적 여유를 빼앗아버리며 인천 장악에 성공하였다.

인민군이 38선에서 낙동강 방어선까지 진격하는데 81일이 걸렸지만, 인천상륙 이후 아군이 38선까지 돌아오는데 15일이 걸렸으니 적의 배후를 불의에 공격한 인천상륙작전의 크나큰 성과다.

월미도의 비극

9월 10일부터 13일 아침까지의 공격으로 많은 민간인들이 죽었다.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가 10명이고, 실종자와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사람을 포함하면 실제 희생자가 100여 명에 이를 것으로 진실화해위원회는 추산했다.[1]

 
상륙하는 미군

참조

바깥 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