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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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권을 필두로한 통치권의 점진적 이양으로 전환: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 참고를 문장 안으로 옮김. 치안유지법 폐지도 서술함.
→‎학무국을 문교부로 개편: 교과서 발간을 추가로 서술함. 1920년대에 유행한 교과중심 교육과정 시기 문단 제목을 추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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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 정책 ===
==== 학무국의 조직 ====
1945년 9월 2일 미군정 주둔 후 얼 락카드(Earl N. Lockard) 대위를 학무국장으로 임명했다. 학무국의 조직은 학교담당, 편수담당, 기획담당, 문화 및 후생복지 담당, 기상담당, 법령정비국, 사업국으로 분장되었다. 학무국은 1945년 12월 문교부로 개편하고 문교부 학무국장에 유억겸(兪億兼)을, 부국장에 오천석을 1945년 12월 19일 임명했다. 이후 문교부 학무국, 법령정비국, 사업국과 학무국내 초등교육과, 중등교육과, 전문교육과, 기획과, 편수과로 개편되었다. 한국의 교육 사정을 모르던 미군정청 학무국장, 문교부장 라카드 소령은 보성전문학교 교수 오천석을 자문역으로 초빙하고, 그를 통해 조선인 명망가들을 모아 교육위원회를 구성했다.
 
1945년 9월 2일 첫 추천자로 초등교육분과에 김성달(휘문의숙 교장), 장면(혜화유치원장), 중등교육분과에 현상윤(중경성대학 예과부장), 전문분과에 유억겸(연희전문 부교장), 윤치호, 고등교육분과에 김성수(보성전문 교장), 여자교육에 김활란(이화여전 교수), 박인덕, 교육전반 서무분과에 백낙준(연희전문 교수), 최규동(중동학교 교장)이 추천되었다. 1945년 9월 14일에는 각급학교 교과서 편찬 및 감수 전담 책임자로 최현배, 이희승, 사회교육 담당자로 최승만을 추가로 추천하여 업무를 안배했다. 이들은 조선인교육심사위원과 협의 혹은 심사위에서 결정한 내용을 감수, 검토하였다. 이 중 윤치호는 12월 6일에 사망했고 김성수는 1945년 9월 22일 미군정 상임고문이 되면서 자신을 대신하여 백남훈을 추천했다. 1945년 11월까지 라카드가 주변의 추천을 받아 구성한 조선인교육심사위원은 오천석, 김성수, 현상윤, 김규식, 유억겸, 유진오, 윤일선, 조백현, 장면, 백낙준, 이병도, 김활란, 윤치영, 안재홍, 정인보, 안호상 등을 조선인교육심사위원으로 위촉해 1946년 5월까지 조선내 교육 및 교육과정, 교육예산 등을 계획, 심사, 심의하게 했다. 미군정 문교부는 이들을 수시로 소집, 자문을 통해 교육정책을 추진했다. 조선인교육심사위원회는 1946년 5월 해산하였다.
 
==== 학무국을 문교부로 개편 ====
1946년 3월 18일에는 문교부장으로 소령 오드리 O. 파이텐저(Aubrey O. Pittenger가 임명된 뒤 1947년 2월에는 유억겸에게 전권을 넘겼다. 학무부장 유억겸은 유임됐지만 1947년 11월 14일 사망하고 문교부차장 오천석(吳天錫)을 대리로 임명했다가 한달 뒤 문교부장으로 임명한다. 1945년 12월에는 학무국 학무과내에 설치된 조선인 문맹 전담 성인문해교육계장에 [[황애시덕]]을 임명하고 이듬해 1월 성인문해교육과로 승격시켜 학무국 직할로 하고 황애시덕을 유임시켰다. 성인문해교육과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 한시적으로 운용되었다.
 
미군정은 한국 교육의 기본 방침을 반공체제의 구축과 [[자유민주주의]] 제도화에 두었다.<ref name="미군정기 국사교과서 해제">{{웹 인용|url=http://contents.history.go.kr/front/ta/main.do|제목=미군정기 및 교수요목기 해제|시리즈=역대 국사교과서|웹사이트=우리역사넷|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확인날짜=2024-04-20}}</ref> 미군정청 학무국은 1945년 10월 15일 초등학교 5~6학년용 국사 교과서를, 12월 11일 중등학교용 국사 교과서를 각각 발간하였다.<ref name="미군정기 국사교과서 해제"/>
1946년 2월 23일부터는 국사 교과목을 각급 학교에서 가르치게 했다. 초등학교의 역사 교과서는 우리나라의 발달이라는 제목으로 정해졌으며 1947년 2월 경에 상권이 발행되고, 1949년 12월 경에 하권이 발행되었다. 그러나 초등학교의 국사는 1947년 12월의 미군정청 훈령 포고에 의해, 사회, 지리와 함께 사회과목으로 통합되었다. 중등학교 역사 교과서는 1945년 12월 미군정청이 이병도 등 진단학회에 집필을 위촉하여 1946년 5월에 중등용 국사 교본이 발행되고 그대로 국사로 이름이 굳어졌다.
 
==== 1920년대에 유행한 교과중심 교육과정 시기 ====
미군정청은 군정 실시 후 완전한 교육과정을 만들 시간이 없으므로 교수요목만을 제시하였다.<ref name="미군정기 국사교과서 해제"/> 미군정청의 [[교육과정|교수요목]]은 정부가 수립되고 교육법이 제정되면 새로 정비할 계획이었으나, 6․25전쟁으로 인해 1954년 4월 새 교육과정이 공포될 때까지 계속 적용되었다.<ref name="미군정기 국사교과서 해제"/> 미군정청의 초등학교 교수요목은 국어․수학․사회 생활․이과 등 4개 과목만 발간되었는데, 그 가운데 사회생활이 가장 체계적으로 제시되었다.<ref name="미군정기 국사교과서 해제"/>
 
1946년 2월 23일부터는 국사 교과목을 각급 학교에서 가르치게 했다. 초등학교의 역사 교과서는 우리나라의 발달이라는 제목으로 정해졌으며 1947년 2월 경에 상권이 발행되고, 1949년 12월 경에 하권이 발행되었다. 그러나 초등학교의 국사는 1947년 12월의 미군정청 훈령 포고에 의해, 사회, 지리와 함께 사회과목으로 통합되었다. 중등학교 역사 교과서는 1945년 12월 미군정청이 이병도 등 진단학회에[[진단학회]]에 집필을 위촉하여 1946년 5월에 중등용 국사 교본이 발행되고 그대로 국사로 이름이 굳어졌다.
 
=== 좌우합작 정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