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센 왕국

독일 영토에 있었던 왕국

프로이센 왕국(독일어: Königreich Preußen 쾨니히라이히 프로이센[*])약칭 프로이센호엔촐레른 가가 지배했던 독일 북부 지역에 위치한 왕국으로, 1701년 1월 18일부터 1918년 11월 9일까지 존재했다. 이 왕국은 1701년에 성립해 1918년까지 존속했던 독일 제국의 중심적 역할을 한 국가였다.[1]

프로이센 왕국
Königreich Preußen
1701년~1918년
국가그대에게 승리의 왕관을
1871년부터 1918년까지 독일 제국 내의 프로이센 왕국
1871년부터 1918년까지 독일 제국 내의 프로이센 왕국
수도
정치
정치체제

국왕
프리드리히 1세 (초대)
빌헬름 2세 (말대)
역사
 • 왕국 승격
 • 군주제 폐지
1701년 1월 18일
1918년 11월 9일
지리
1871년 면적348,779 km2
인문
공용어독일어
인구
1910년 어림34,472,509명
인구 밀도98.8명/km2
경제
통화
이전 국가
다음 국가
신성 로마 제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프로이센 공국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왕령 프로이센
단치히 자유시
스웨덴령 포메라니아
헤센 선제후국
프랑크푸르트 자유시
나사우 공국
하노버 왕국
홀슈타인 공국
슐레스비히 공국
작센라우엔부르크 공국
실레시아 공작령
프로이센 자유주
단치히 자유시
폴란드 제2공화국
바이마르 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벨기에
덴마크
리투아니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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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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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의 기반이 되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프로이센 공국요한 지기스문트에 의해 동군 연합이 된 것은 1618년의 일이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선제후는 1660년, 프로이센 공국을 폴란드와 스웨덴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켰다. 약소국이었던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에 상비군 제도와 중상주의를 도입하고 강력한 절대왕정의 기반을 마련한 것은 대선제후라 불리는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치적이다. 이로 인하여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3세 때부터는 프로이센의 왕을 칭하면서 왕국을 세울 수 있게 된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1701년 1월 18일 쾨니히스베르크를 수도로 삼아 그곳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여,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1세가 되었다. 그는 눈 앞으로 다가온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을 위해 병력을 모으고 있던 신성 로마 제국레오폴트 1세를 위해 군사 8000명을 원군으로 파견해 지원하는 것을 조건으로, 신성로마제국의 영역 밖인 프로이센에 대해 왕이라는 호칭을 얻었던 것이다. 그 뒤 브란덴부르크와 프로이센 전체가 프로이센 왕국으로 불리게 되었다.[2]

프리드리히 1세는 루이 14세를 모방하여 화려한 생활을 즐겼으며, 대단한 낭비가였다. 그 낭비는 항상 국고를 압박했지만, 동시에 교양인이기도 했기에 프로이센 대학교를 세우고, 예술 아카데미와 과학 아카데미를 설립하여 수도 베를린을 고대 아테네에 버금가는 문화 도시로 바꾸었다.

군사 강대국으로서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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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1세가 1713년에 서거하고, 뒤를 이어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즉위하였다. ‘군인왕’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그는 부왕과는 정반대의 성격이었다. 그는 군사력을 한층 더 강화하는 한편, 관료제도를 정비했으며, 그 바탕 위에서 절대 왕정을 확립하여 프로이센을 군사강국으로 키웠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국가의 번영과 영토 확장은 무엇보다도 군사력이 강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그에 따라 병력면으로는 유럽에서 4위였지만, 실제적인 군사력은 유럽 최강을 자랑했다. 이렇게 하여 프로이센은 군국주의 국가이자 고도의 능률성을 가진 관료주의 국가가 되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아들로 부왕의 뒤를 이은, 프리드리히 2세는 강인한 정신과 예리한 지성을 갖춘 계몽군주였다. 그는 부왕의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아, 병력을 20만으로 증강하는 등 군비를 더욱 강화하고, 그 군사력을 바탕으로 영토를 확장해갔다. 1740년에는 합스부르크 가를 계승한, 오스트리아의 여제인 마리아 테레지아와 두 차례 전쟁(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7년 전쟁)을 통해 오데르강 유역의 슐레지엔 지방을 빼앗음으로써, 신성 로마 제국의 지위를 이어받고 있던 합스부르크 가를 크게 위협했다. 또 오스트리아, 러시아와 더불어 폴란드 분할에도 끼어들어, 동 프로이센브란덴부르크 공국으로 연결시키는 데 성공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프로이센을 유럽의 군사대국으로 성장시켜, 1772년의 제1차 폴란드 분할에 가담하여 서 프로이센을 합병한 뒤로도 계속 영토를 확장해나갔다. 또한 프리드리히 2세는 학문과 예술의 애호가였으며,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 볼테르와 달랑베르 등을 가까이 하면서 계몽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근대적인 법전을 편찬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는 훗날 ‘프리드리히 대왕’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위기와 개혁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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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때에 들어서면서 프로이센은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왕은 어리석었으며 군대는 나약해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였으며, 결국 예나 전투아우어슈테트 전투 등에서 연달아 패배하였다. 이에 따라 1807년 틸지트 조약을 체결하여 영토의 절반을 잃고 많은 배상금을 지불하였으며 대륙 봉쇄령에 따른 대영무역금지와 프랑스군 주둔 등의 경제적 압박을 당하여 사실상 프랑스의 지배를 받는 속국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샤른호르스트클라우제비츠, 슈타인, 하르덴베르크 등은 근대화를 위해 개혁을 실시하여 농민 해방과 행정 기구의 쇄신을 달성했다.

프랑스에 의한 지배는 독일인들에게 민족으로서의 자각심을 불어넣어, 프랑스로부터의 해방자로서의 역할을 프로이센에게 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같은 열광적인 애국자들이 나타나 내셔널리즘을 고취했기 때문에 독일 통일을 목표로 하는 운동이 시작되었지만, 프로이센은 아직 그러한 일부 자유주의자들의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복고와 반동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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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 개혁을 단행한 프로이센은 대(對) 나폴레옹 해방전쟁에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여 1815년의 워털루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치면서 다시 강대국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1815년의 빈 회의에서 프로이센은 폴란드 분할로 획득한 영토의 일부를 사실상 러시아에게 양보하게 되었지만, 그 대신 베스트팔렌 등을 획득하여 인구가 1000만 명에 이르렀다. 동년에는 독일 연방에도 가맹하여 맹주인 오스트리아 제국과 세력을 양분하였다. 그러나 이 시대는 프로이센에 있어서 정신적인 정체를 부르는 반동의 시대였다.

러시아 및 오스트리아와 신성 동맹 (1815년)을 체결한 프로이센은 자유주의적 독일 통일 운동을 억압하여 개혁은 정체되었고 관료절대주의가 만연하게 되었다. 1848년 3월 혁명으로 한때 캄프하우젠, 한제만라인란트 시민들을 중심으로 하는 내각이 성립되었으나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지주 지배체제가 다시 강화되었다.

독일 제국의 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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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1918년 사이 프로이센 왕국이 독일 제국 내에서 차지한 영역

1862년에 내각 총리 대신으로 취임한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당시 존재했던 의회와 언론사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독일의 통일은 오직 철과 피로써 결정된다."고 주장하여, 철혈 정책을 내세우게 된다. 그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하여, 1871년 독일 제국의 선언을 이끌었고, 빌헬름 1세를 황위에 앉혔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1888년에 즉위한 국왕 빌헬름 2세와 좋지 못한 관계로 결국 1890년에 물러났다. 빌헬름 2세는 식민지 확장 정책을 펼치고자 프랑스벨기에, 영국, 네덜란드와 다투는 경우가 잦았다. 프랑스와 스페인은 2차례 모로코 문제 때문에 다투었고, 영국과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경쟁적인 관계였으며, 벨기에와 국경 문제로 다투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비화해 독일을 패전국으로 몰고 가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빌헬름 2세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망명했다.

독일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은 1차대전의 패전과 함께 1918년 11월 9일에 종말을 맞이하였다.

역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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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 왕가 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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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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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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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채인택. 칼리닌그라드 쾨니히스베르크. 중앙SUNDAY. 2013년 12월 24일.
  2. 물론 서류상으론 브란덴부르크는 신성 로마 제국의 영역이었고 기존과 마찬가지로 신성 로마 제국의 프로이센과 동군연합인 상황이었다. 다만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령을 당시에도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군주국이라고 칭했던 것처럼 관습적으로 부르는 것이다.